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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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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출애굽기 2017. 12. 31. 00:00

<출애굽기 34:18~28> 말씀을 받기 위한 비용 계산

 

 성경말씀 : 출애굽기 34:18~28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25  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26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말씀묵상

하나님께서 모세와 언약을 재갱신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종교와 문화, 풍습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가나안이 축복의 땅이면서 유혹의 땅임을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놓쳐 버릴 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재갱신이기에 본문의 내용은 이미 앞의 내용들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언약의 모든 내용을 오늘 본문에 다 기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몇 가지만 추려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강조하시고자 하는 내용들을 간추려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한 무교절과 초실절, 안식일,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에 관한 것은 율법의 핵심적인 내용들입니다.

이 내용들이 핵심적인 것은 그것들이 구원에 관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율법이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씀을 받는데 40일동안 떡과 물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금식도 아니고 단식입니다.

인간이 40일동안 물까지 먹지 않으면 죽게 되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붙들고 계시기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식음을 전페하고 있습니까?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땅에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마음이 부유해서는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만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 가난의 의미는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지금 모세가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말씀을 받는 바로 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과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비용계산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전도폭발 훈련에서 하듯이 4영리를 전하고 거기에 수긍하게 함으로써 영접기도만 시키면 거듭나는게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4영리로 전하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전하든지 상관없이 전도를 받는 상대방의 상태가 가난한 심령인 경우엔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믿는 즉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섬깁니다.

성경이나 교회사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보십시오.

그들은 구원받은 즉시 삶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비록 부족함과 연약함은 있지만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리에 대한 갈급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절차에 따라서 강단 앞으로 나오고 영접기도를 했다고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그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심령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진리에 대한 절대적 갈급함이 없는 상태에서의 복음은 그저 자신의 인생을 좀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장식해 주는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은 무늬만 있는 그리스도인을 교회 안에서 양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값없다고 하는 것은 구원사역을 이루는데 있어 우리 인간이 한 것이나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선행이나 공로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아가 부정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자존감이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인간의 자존감이 완전히 박살나고 무너지는 상태가 바로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게 됩니까?

아니죠.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인생에서 수많은 고통과 고뇌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고 청교도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가벼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기가 힘듭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들을 보십시오.

생각하기 싫어하고 고뇌하기 싫어하는 세태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가 교회 안에까지 흘러들어와 신앙도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진지함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감성이나 터치해 주고 위로해 주는 예배의 형태와 프로그램들이 교회를 점령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40이란 숫자가 갖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 그리고 연단을 말합니다.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말씀을 받는 기간을 40일이 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과 연단의 과정, 나아가 식음을 전폐하는 절대적 가난의 상태에까지 이르러야만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 당신은 비용을 치르고 계십니까?

 

 기     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육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비용 계산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내일말씀 : 출애굽기 34: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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