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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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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출애굽기 2017. 12. 14. 00:00

<출애굽기 32:1~3 (2)> 우리를 위하여

 

 성경말씀 : 출애굽기 32:1~3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말씀묵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 것을 요구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배운 신관입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면을 도외시 하고 오직 현실적으로 자신들에게 복 주기만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그릇된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기에 그들의 역사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죄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라는 신앙의 열심과 헌신이 얼마나 큰지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만들 금송아지를 위해 자신들의 귀에서 금고리를 모두 빼어 옵니다.

그 금고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귀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것들을 아까와하지 않고 바칩니다.

왜요? 자신들을 위해서 입니다.


흔히들 헌금이 많이 나오면 은혜가 넘쳐서 그렇다! 고들 생각합니다.

물론 구원의 은혜가 넘쳐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내가 받은 복, 받을 복 때문에 헌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를 보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금송아지를 만드는데도 모든 백성이 다 바쳤습니다.

아낌이 없었습니다.

불교인들도 절을 새로 짓고 불상을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헌금들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금액들입니다.

자신들의 복을 위해서입니다.

결국 헌금도 자신의 감정에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자기의 마음에 맞으니 금고리를 모두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데도 모르니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아론이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어준 결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면 생각밖의 파격적인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이 너희들 왜 그러느냐?

깨어 있으라, 회개하라! 했으면 저들은 냉정하게 돌아 섰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론에게 욕설을 하고 저주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론이 그렇게 하자! 금고리를 가져오라! 하니까 "저 양반 우리 맘에 든다!" 하고서는 엄청난 금고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죄를 들추고 하나님께 회개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출세한다 하면 헌금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은혜도 축복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말씀안에서 모든 것을 비추어 보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가장 부패하고 타락되기 쉬운 때는 인간중심이 될 때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도록 하나님을 믿을 때가 부패되기 시작하는 때임을 명심하십시다.

보이는 것 중심으로, 받을 것 중심으로 믿기 시작하면 그것은 부패된 신앙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번영신학이나 성공신앙, 기복신앙 모두가 그러한  신앙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듣기 좋아합니다.

금송아지를 요구할 때 그것을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위한 것 조차도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기복신앙은 배격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수단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위로만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위로와 평안은 십자가를 통한 위로와 평안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철저한 무너짐이 있을 때 오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에 대한 책망을 듣고 싶지 않고 철저한 회개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거 말고 그저 삶에 지친 나의 마음을 위로만 해주면 됩니다.

사실 그럴 양이면 굳이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아름다운 동영상 한 편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사실 성경 말씀보다도 그런한 동영상들이 더 감동적이고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 만큼 부패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욕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는 모든 동기와 행위를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도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다만 천국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뿐입니다.

나를 지옥 보내신다 해도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마땅히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의 행동이 포악해질 때 말세가 되었다 라고 얘기하는데 성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고운 모양이라도 그것이 인간 중심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간중심성이 극대화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조차도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위하여” 라는 외침이 하늘을 향하여 울려져 가고 있습니다.

 

 기     도 

우리의 신앙관이 인간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 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출애굽기 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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