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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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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10. 9. 00:00

<창세기 9:22~29> 가나안이 저주 받은 이유

 

 성경말씀 : 창세기 9:22~29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말씀묵상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응 대할때마다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는 어떻게 아비가 자식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정도의 큰 잘못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둘째는 잘못은 함이 했는데 왜 저주는 함의 아들인 가나안에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본문에서 노아가 자신의 자녀에게 복과 저주를 내린 것은 실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것입니다. 족장들 시대는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족장들의 입을 통해 주셨습니다. 복과 저주를 내리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그 예언의 시점이 노아가 술이 깨어난 후였기에 마치 노아가 화가나서 저주를 내린 것같이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때에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설교자의 사생활이 좋지 않거나 설교를 듣는 청중과의 신뢰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으면 그 설교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둘째 의문을 풀기 위해 24절, 25절을 보겠습니다.

노아가 술이 깬후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작은 아들이 누구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구절을 참조합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창 11:10)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창10;2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7:11)

먼저 노아는 500세에 첫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그 이후에 두 아들을 더 낳습니다.

셈의 나이 100세 때가 홍수 후 2년이 된 때입니다.

셈이 98세때 홍수가 일어났고 그때 노아의 나이는 60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2세에 낳은 것입니다.

노아가 첫 아들을 500세에 낳았으니 셈은 일단 장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셈은 야벳의 형이라 했으니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은 함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들의 나이 순서는 함, 셈, 야벳입니다. 

이름을 나란히 기록할 때 나이 순서로 적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노아의 세 아들들을 나란히 기록할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기록한 것은 셈이 둘째이지만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갈 자녀이기에 장자의 위치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24절의 작은 아들은 셈이나 야벳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히브리 단어로 아들은 손자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러면 작은 아들은 작은 손자의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창 10:6)

그 중에 가나안은 제일 마지막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함의 작은 아들일 것 같습니다.

 

추정해보면!

노아의 장막에서 벗은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가나안입니다.

특히 가나안 족속이 성적으로 대단히 문란한 민족이었음을 감안할때 가나안도 성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가나안은 노아의 하체를 보고 비웃은 정도가 아니라 동성연애적인 어떤 행동을 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 함에게 고하고 함께 들어와 노아의 하체를 보면 조롱햇던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이 함께 그 일에 관여했다는 단초는 22절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24절에 셈과 야벳이 개별적으로 기록된 것과는 달리 22절에서 함을 표현 할때는 가나안의 아비란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분명 노아의 하체를 본 일에 부자가 함께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함보다도 성적으로 문란한 가나안의 행동이 더 문제가 많았기에 저주가 가나안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하체를 조롱거리로 삼은 일이 저주가 될 만큼 그렇게 악한 일이었을까요?

이 문제를 단순히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등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게 되면 실마리를 풀기 힘듭니다. 

 

하체는 종족 번성의 근원입니다.

특히 노아의 하체는 여자의 후손의 계보를 이어가는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노아의 하체를 조롱거리로 삼았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원역사 시대를 살아갔던 족장과 그의 자녀들은 아담으로부터 계속하여 여자의 후손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자신들의 계보를 통해 에덴을 회복시킬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자손들이 번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자의 후손 때문이었습니다. 

노아의 하체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귀한 부분이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그것을 알았기에 그 부분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 구원의 통로가 되는 하체를 성적 노리개로만 보았습니다.

그는 메시아나 구원 같은 영적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누리는 쾌락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이러한 의식과 행동은 마치 에서가 영적인 축복의 통로인 장자권을 우습게 여겨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망령된 행동과 동일합니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가나안의 행동은 저주를 받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영적인 것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가나안같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며 우리는 셈과 야벳같이 구원이 중요함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구원에 반열에 들어올 수 있도록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축복보다는 세상의 보이는 복을 더 좋아하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가나안이 내 속에 들어 있지는 않는지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기     도

우리가 받은 구원과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1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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