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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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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4. 14. 00:00

<창세기 43:1~14 (2)> 상한 심령을 원하시는 하나님

 

 성경말씀 : 창세기 43:1~14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말씀묵상

 

유다의 설득에 의해 애굽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한 야곱은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요셉에게 줄 많은 선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애굽 총리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는 야곱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에서를 만날때에도 야곱이 이런 선물을 미리 준비했던 것을 보면 사람이 가진 기질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 가 봅니다.

야곱은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향 조금, 꿀 조금,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또한 곡식 값을 두 배로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최선을 다해 선물을 준비하고 두 배의 곡식 값을 가져가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애굽의 총리에게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겠습니까?

물론 준비한 자는 기근 속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요셉의 마음을 풀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지금 원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형님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베냐민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6-17)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도 정성껏 제물을 가지고 제사 지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런 정성과 제물이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성껏 번제로 드린 무수한 제물의 연기는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덮어버렸고 그들은 그 제사로써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정작 중요한  죄악된 삶은 도려내지 않고 적당히 넘어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레위기 16:29-31절을 보면 속죄일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라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속죄일은 일 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나아와 사함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일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화목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안식일 중의 안식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날 너희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안식일 중에 안식일인데 왜 스스로를 괴롭게 합니까?

여기서 괴롭게 한다는 것은 원문상의 뜻이 금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금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때문에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참된 안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 즉 상한심령으로 통회자복 하는 일 꼭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갈때 상한심령을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성이 담긴 선물만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심령 깊이 숨겨둔 죄악들을 적당히 덮어버리려 합니다.

내가 이렇게 예배하고 정성을 드렸으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화목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라고 자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 깊이 감추어 놓은 죄악들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상한심령이 되어 통회하는 모습으로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예배는 축제’ 라고 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키며 잔치 같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예배들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가 축제라는 말은 원론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임재함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만큼 진정한 축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축제는 흥만 있으면 가능한 세상의 축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하는 축제요 안식입니다.

적당히 넘어가고 싶은 내면 깊이 감추어 둔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끄집어내고 애통한 심정으로 회개해야만 주어지는 축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감정을 북돋는 예배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할 일들을 놓쳐버립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고 있다는 그 사실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들 유야무야 적당히 덮어버립니다.  

눈물을 흘리고 감격은 하지만 그 눈물과 감격 속에 상한 심령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정작 하나님 앞에 꼭 내 놓아야 할 은밀한 것들을 내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사할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악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논리적 순서상으로는 죄악이 드러나는 것이 선행됩니다.

그 뒤에 용서함의 은총이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경험 없이 사죄의 은총을 노래하기에 십자가의 복음이 값싼 은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사함의 은총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만 주어지는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생에 걸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빛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심연 밑바닥에 있는 추악한 것들까지 모두 드러나게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십자가를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은총과 죄를 이기는 능력의 비결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경험하며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모두 사함 받았으니 이제 죄 때문에 신경 쓸 것은 없다. 오직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만을 즐기며 인생을 축제와 같이 살자” 라는 생각으로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졌면서도 적당히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신앙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파’ 라는 이단의 신앙이 그런 식의 믿음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만듭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설수록 우리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할 때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이 됩니다.

결국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원했던 것은 좋은 선물이 아니라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며 애굽으로 팔았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통회하고  회개하며 진정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정성을 깃들인 종교적 열심이나 인간의 비전과 의지를 가지고 이루어 놓은 사역의 결과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요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조명아래 숨기고 싶은 자신의 정체가 다 드러나고 그 십자가의 피로 이룬 샘물에 정체가 드러난 우리의 심령을 흥건히 적시우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기     도 

 

 

 

 

인간의 산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 십자가만 붙들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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