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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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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15. 00:00

<창세기 39:3~6 (1)> 고지론이 가진 맹점

 

 성경말씀 : 창세기 39:3~6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말씀묵상

 

요셉이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온 이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 사람인 애굽의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는 증언입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9:3).

도대체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그를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조금만 다른 사람이 안 본다 싶으면, 꾀를 부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인은 요셉이 팔려오게 된 내력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신세 한탄이나 늘어놓으며 과거에 사로잡혀서 허랑방탕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태도는 분명 다른 종들과 달랐습니다.

그러한 요셉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엇이 그로 다른 종들과 구별된 자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지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삶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변함없는 밝은 모습으로 모든 일에 성실과 정직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켜보며 감탄해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요셉은 지금 노예의 신분으로 와 있습니다.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에게 형통함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종살이에서  풀려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디발로 하여금 요셉의 삶에서 형통함을 생각하게 했을까요?

 

보디발은 요셉을 통하여 진정한 형통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요셉보다야 보디발이 훨씬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바라보면 자신의 삶이 형통한 삶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종살이 하고 있는 요셉은 자신의 삶에 자족하며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비해서 자신은 요셉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족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형통한 삶이라면 행복지수가 높아야 하는데 정작 행복지수가 높은 쪽은 요셉이었습니다.

노예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디발은 알았습니다.

분명히 요셉이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디발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노예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도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명 고지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고지를 선점하고 점령해야만 승리할 수 있듯이 복음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벌어 성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논리가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랑거리를 모두 무너뜨립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성경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철저히 인간의 능력이나 탁월함을 배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때 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고지론의 논리대로 한다면 왕자의 위치에 있을 때 그 권력을 이용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이 훨씬 효율적이고 쉬웠을텐데 말이죠.

오히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묻혀 살다가 그저 양치는 일개 목동이 되어 있을 때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자랑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들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많이 있어서 복음이 전파된다면 그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높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일 확률이 농후합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복음의 영향력이 강성했던 시절은 신자들의 사회적 위치 분포도가 낮은 곳에 많이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제국의 복음화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그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던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리던 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도 없고 알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을 받아도 꺾을 수 없는 구원의 기쁨과 능력이 로마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을 감화시켰습니다. 

그것이 참된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일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복음의 능력과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고지에 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생긴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기독교 문화라는 허울뿐인 복음의 전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요 기독교인들이 고지위에 올라가 영향력 있는 위치 곳곳에 포진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때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 문화라는 허울뿐인 복음은 여전히 고지 위에 올라간 사람들에 의해 잘 전파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고지위에는 올라가지 말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를 목표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과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에도 늘 가나안을 잊지 못하며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에게 총리자리는 고지가 아니었습니다.

노예자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주신 또 다른 환경이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지는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환경과 위치, 거기가 비록 노예의 자리와 같이 비천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바로 우리의 고지입니다.

지금 당신이 서있는 위치 바로 그곳에서 충심을 다해 최선의 삶을 살아 가십시요.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통함을 보며 주님께 영광돌릴 것입니다.

 

 기     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지 말게 하시고

내가 있는 그곳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최선을 다해 살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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