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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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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11. 00:00

<창세기 38:2~11 (2)> 오난은 복음의 단맛만 즐겼습니다

 

 성경말씀 : 창세기 38:2~11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말씀묵상

 

오난의 문제는 정작 계대결혼의 본질인 대를 이어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형수와의 성관계는 즐겼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말과 오난이 한번의 관계만 있었듯이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계대결혼의 특징을 표현한 기술이지 딱 한번만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계대결혼 자체가 두 사람이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난은 자신이 형의 씨를 이어가기 싫었다면 형수와 아예 관계를 맺지 말아야 했습니다.

장자의 대를 이르려는 마음 없이 형수와 관계를 맺는 것은 사실상 간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 유다가 형수에게 들어가라는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유다가 계대결혼을 통해 장자의 대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다는 그 일이 그저 조부로부터 내려온 야곱 가문의 가훈과 같은 것이었기에 막연하게 그 일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의식 없이도 주일이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이 일이 있을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유다의 신앙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도 계대결혼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세째 아들인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이 더욱 확연해집니다.

따라서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정녕 싫었으면 거부했어도 유다가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간 것은 형수와의 육체관계는 즐겼다는 것입니다.

 

오난은 계대결혼을 통해 자신에게 유익(쾌락) 되는 것만을 취하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한 오난에게 죽음으로 징계하신 것입니다.

 

사실 계대결혼을 거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벌로 다스리지는 않앗습니다.

이 계대결혼을 명문화 한 율법의 조항을 보면 계대결혼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라고 명했습니다.(신25:5-10)

 

그런데 오난이 계대결혼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자 하나님께서는 계대결혼에 나타난  영적 진리를 확실히 가르치시기 위한 모델 케이스로서 오난의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영적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모델 케이스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칠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김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죄라도 우리의 심령가운데 놓아두지 말고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는 영적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족속 이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와 같은 무자비한 도륙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말렉은 죄에 대한 영적 원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모델 케이스였습니다.

왜 그들이 모델 케이스에 걸려 들었습니까? 

그것은 아말렉 족속의 죄악이 어떤 이방민족의 죄보다 컸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대결혼을 거부했다고 해서 죽인 사람은 오난 한 사람뿐입니다.

오난의 죽음은 계대결혼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등한시 여기는 사람이 당할 영원한 멸망을 가르치는 모델 케이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난을 그 모델케이스로 삼은 것은 그가 계대결혼을 자신의 쾌락의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신앙이 자신의 육신의 삶에 유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면 분명 이는 오난의 신앙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결코 이 땅에서 육신의 삶에 유익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채워가는 삶입니다.

그분의 약전 그분의 생애가 우리의 약력과 이력이 되어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의 풍성함은 주님의 족보를 채우기 위해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복음의 풍성함을 그저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육신의 쾌락과 유익을 채우는 것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대결혼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적환희는 본질을 추구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덤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채우며 살아가는 삶속에 육신의 유익과 풍성함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덤일 뿐입니다. 그저 감사할 뿐 거기에 우리의 마음과 관심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족보를 채워가는 삶을 회피하게 됩니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난은 형의 아이를 낳게 되면 발생할 손해를 생각했습니다.

형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차자인 자신이 장자의 권리를 갖게 되어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을터인데 자신이 손해보면서까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씨를 가지고 형의 씨를 만든다는 것이 자신의 희생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장자의 대를 이으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족보를 이어가고 채워가는 삶에는 필히 희생과 헌신의 삶이 요구됩니다.

시간, 물질, 인간관계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서 손해를 입는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가고 채워가는 삶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며 육신의 떡으로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대는 군중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주님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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