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qtman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Rss feed Tistory
구약 QT/창세기 2017. 3. 12. 00:00

<창세기 38:12~26> 다말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유다 집안의 구원

 

 성경말씀 : 창세기 38:12~26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말씀묵상

 

오늘 본문은 38장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꺼리고 회피하고픈 내용입니다.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임신을 하게 되는 참으로 콩가루 같은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둘째 오난이 죽음을 당하자 며느리 다말을 딤나에 있는 친정으로 보냅니다.

계대졀혼법에 의하면 세째 셀라가 다말에게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속내는 딴데 있었습니다.

다말에게 들여 보내면 셀라도 죽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다의 생각엔 며느리 다말이 남자 잡아먹은 여자로 여겨졋던 것 같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생각들은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사실 두 아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말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잘못을 며느리에게 책임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내리막 길을 간 사람들의 특징이 분별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의 기준이 자기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오난이 죽었을때 그 과정을 자초지종 들어보는 관심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입견으로 그런 기회조차 다말에게 주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유다는 세째아들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그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계대결혼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방이었던 다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어떠하든지 그 집안 장자의 대를 이어가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다말은 아직 젊었기에 자신의 족속과 재혼을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유다의 집안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 집안의 대를 이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고 이방인인 다말이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마도 다말은 시집와서 야곱 가문에 내려오는 약속의 후손 얘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손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까지야 몰랐겠지만 그 후손이 오도록 대를 이어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복된 일이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수치와 죽음에 대한 각오를 하면서까지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문화가 극도로 문란한 가나안 땅에서 자라나면서도 다말은 진리를 갈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나안이 너무 죄악이 관영했기에 다말은 그러한 문화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며 유다의 집안 밑 바탕에 깔려있는 영적인 기류를 느꼈던 것입니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을 간다고 했듯이 유다가 타락했어도 야곱의 집안에서 자라며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맘에 배어진 택자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다말은 바로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 희미한 계시를 보고서도 다말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믿음입니다.

 

다말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요 그녀는 유다가 자신에게 세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양털 깍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딤나에 온 유다를 유혹하기 위해 창녀로 변장을 합니다.

잘못하여 들키는 날엔 온갖 수모와 조롱를 당할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야만 하는 위험한 게임을 지금 다말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말에게 있어 유다 집안의 대를 이어 가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윤리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 본다면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로 하여금 유다를 유혹하는 것을 막으시고 셀라가 그녀에게 들어가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심으로 좀 더 상식적이고 고상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통해 윤리 도덕과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윤리 도덕은 문화권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를 수도 있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절대화 시킬때 그것은 또 다른 인간의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윤리 도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성품이 담긴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윤리 도덕조차도 인간의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사람의 고상함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인간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포장된 죄악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통해 인간의 가장 고상한 부분까지도 산산이 깨질 때 구원에 다가 갈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화대비 대신 다말에게  맡겼던 담보물들을 찾아오기 위해 염소 한 마리를 친구에게 주며 그것을 찾아오게 합니다.

자신이 직접 찾으러 가기엔 수치스러웠던 것입니다.

창녀에게 들어갈 정도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창녀와 같은 자들임도 불구하고 의인인양 윤리 도덕으로 우리 내면을 치장하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유다에게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말을 화형시킬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그 화형대는 유다가 올라가야 할 자리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에게 그가 맡겼던 보증물들을 보여 줍니다.

이때 성경의 표현이 ‘보소서’ 입니다. 

이 표현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이 죽은 것 같이 속이려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가지고 야곱에게 보이며 한 말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닌가 보소서” (창37:32)

성경은 ‘보소서’ 란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함으로 두 사건을 오버랩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는 다말이 보낸 물건들을 보는 순간 지난 날 아버지를 속였던 자신의 죄악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때서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녀가 나보다 옳도다”  비로소 유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말이 당할 수치는 자신의 수치였고 그녀가 오를 화형대는 자신이 오를 화형대였습니다.

다말의 희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유다 가문은 생명을 얻었고 유다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수치와 죽음을 각오한 다말의 희생과 헌신이 유다의 가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한 것입니다.

그녀는 희미한 계시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지금 이 시대만큼 하나님의 계시가 많이 열려진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말보다 못한 신앙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것은 차치하고 조그만 희생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 우리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한 알의 썩는 밀알이 적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     도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하시고

나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8:27~30

 

,
TOTAL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