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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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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9. 14. 00:13

<창세기 3:14~19> 고통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성경말씀 : 창세기 3:14~19 

14  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말씀묵상 

흔히 인생을 고해라고 표현합니다.

인류가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그 기원이나 해결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혹자는 인류에게 처해진 고통의 문제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무신론자가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만 하셨을뿐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불합리한 고통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가에 대한 의문이 들만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불손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의 결과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그렇게도 큰 잘못이란 말인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표면적으로나 윤리차원에선 큰 잘못이 아닌 듯 보일 수 있지만 그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불경죄에 해당하기에 그 대가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대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되는 오늘날 시대정신 속에서 이 일은 분명 하나님이 냉정한 분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정의 없는 사랑은 감성적 온정에 지나지 않는 위선이란 사실을 직시할 때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 결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징계 가운데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율배반적인 두 개념의 사랑과 공의를 조화시키는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 전에 먼저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표시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동물의 가죽 옷을 그들에게 입히십니다.

그런데도 잘못은 인간이 해놓고 그 잘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며 그 분을 향하여 불평하며 의심하는 죄악을 우리는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뿌리박힌 죄악의 성향들이 얼마나 강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모든 자연에게 주어진 형벌들을 보면서 겸비한 자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죄의 결과의 심각성입니다.

아마도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즉시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다면 아담이 그 범죄에 동참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이 보여 우리가 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아담 하와는 범죄한 즉시 하나님과 영적 단절이 왔고 결국엔 육체의 죽음도 왔으며 그 결과로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는 끊이지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범죄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나의 범죄 결과가 나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고통을 준다는 인식을 깊이 생각 한다면 감히 죄 짓는 것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세째, 고통을 대하는 우리 자세의 변화입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고통을 힌두교도들 처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숙명론자의 인생관과 또는 고통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매개체로 삼는 무신론자의 외침 그리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의심하는 회의론자의 생각 모두를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통해 우리는 모든 고통의 기원이 되는 죄악의 사슬에서 끊어진 바 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자연 피조세계가 모두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에 구원받은 우리에게서 고통의  환경이 여전히 제거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지도를 보며 가는 길과 그것을 전혀 모르고 지도도 없이 가는 길은 그 행로와 과정이 동일하게 험할지라도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비록 고통이 타락으로 인한 저주로 시작되었지만 또한 그 고통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되며 구원받은 이 후에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일에 큰 유익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불신자와 똑같은 고난의 가시밭 길을 지나간다고 해도 가볍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하시고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하신 것도 궁극적으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죄가운데 빠진 인간이 무병영생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얼마나 기고만장하며 하나님을 떠나 살겠습니까?

인간이 유한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삶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읽어내는 안목과 감사할 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네째, 우리는 전 우주가 구원받고 회복되는 때를 기다리며 사모해야 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관리 하에 있었기에 인간의 대표성으로 인해 함께 형벌을 받게 되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들도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다고 표현 합니다.

자연으로 인한 모든 재해와 미생물에 의한 모든 질병이 바로 이 피조물들이 외치는 탄식과 아우성입니다.

인간의 범죄가 많아 질수록 저들의 고통소리도 커집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자연재해들을 대하면서 점점 관영해 가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저들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풍조에 떠내려 가는 나의 믿음을 되돌아 보고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자연계가 고대하는 바,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벗어나 자유함에 이르는 때 곧 주님의 재림으로 완전하게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도 그 나라가 임하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의 죄때문에 고통받으며 외치는 저 자연의 탄식 소리를 듣게 하사

날마다 나의 죄를 돌아보게 하소서

이 모든 고통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주님의 나라를 고대하오니 속히 그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장 20~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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