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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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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1. 21. 00:00

<창세기 30:1~13> 열정과 경쟁이 불러온 야곱 집안의 갈등과 긴장

 

 성경말씀 : 창세기 30:1~13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말씀묵상

 

열정적이라는 단어처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감동적이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무언가 큰일을 이룬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열정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은 의외로 자기 열정이 뛰어난 사람들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에 걸친 인생의 광야를 통해서 그 열정을 철저하게 죽이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그들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계심을 봅니다.

여기에 신앙이라는 신본주의와 신념이라는 인본주의의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신앙과 신념의 사람이 추구하는 믿음은 전혀 상반된 삶의 방식과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다른 영혼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는 생명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신념의 사람은 온갖 명분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을 자기 야망 성취의 도구로 삼고자 합니다.

자기 성취에만 집착합니다.

 

라헬은 그런 성향이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는 있었지만 레아와는 달리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존심 강한 라헬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에서 소외되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언니 레아의 아픔을 라헬은 손톱만큼도 헤아려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남이야 불행하던 말든 자신이 모든 행복을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라헬은 자신의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로 들여보내 단과 납달리를 낳습니다.

 

과거에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을 얻겠다는 입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첩을 들이게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는데, 라헬은 오직 자존심의 싸움을 위해서 첩이라는 잘못된 방식까지 동원했습니다.

라헬은 경쟁적 의식에 사로잡힌 자기 열정의 증오만을 보여주었습니다.

 

“단”이라는 말은 이 아이의 출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너진 자기 자존심을 세워주셔서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납달리”는 ‘싸움, 경쟁’이라는 뜻입니다.

레아와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레아가 받은 하나님의 은택을 자신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빼앗았다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이 축복이고 자기 자존심이며 열정적인 삶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러한 라헬의 태도는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양보하고 희생하며 살았기에 순박했던 레아를 함께 경쟁에 끌어들이는 욕망을 촉발시켜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게 합니다. 

야곱의 집안에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레아도 자신의 시녀 실바를 통해 갓과 잇사갈을 낳습니다.

때로는 지나친 인간적인 열정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열정 안에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것을 때때로 보게 됩니다.

그로 인해 지체들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연약한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습니까?

신앙생활이란 자기 혼자 앞서 멀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나아가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연약한 지체들을 함께 아우르고 격려하며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 내 딛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인간의 자존심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비록 내가 못할지라도 다른 지체가 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격려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엔 첩인 하갈의 자식이 약속의 후손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야곱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은 왜 모두가 약속의 후손에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각각의 사건이 구원을 다각도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각 사건들은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는 각각의 그림입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일지라도 어떤 그림 안에서 어떤 위치에 그려져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인물이 묘사하는 복음의 설명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똑같은 라헬이 세상이 되기도 하고 예수님이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구원의 유일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똑같은 첩의 자식인데 빌하과 실바의 자녀들이 약속의 후손이 된 것은 구원의 포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첩의 아들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어느 특정한 계층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혈통과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계층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구원이 이방인 된 우리에게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그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줄 착각하지 말고 이 구원을 감격과 기쁨을 주위에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었듯이 나의 주변에 엉망진창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     도 

 

 

 

 

나의 열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0: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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