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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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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11. 20. 00:00

<창세기 23:1~4> 부활신앙이 낳은 나그네의 삶

 

 성경말씀 : 창세기 23:1~4

 

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말씀묵상

 

오늘 본문은 사라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사라의 죽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죽음에 대처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요 아브라함이 “사라의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원문의 표현대로 직역하면 “사라의 얼굴 위에서 일어났다” 가 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때에도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아이가 살아납니다.(왕상17:21-22)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릴 때에도 엘리사가 죽은 아이의 눈에 자기은 눈을 , 그 아이의 입에 자기의 입을 대었다가 그 얼굴 위에서 일어나자 아이가 살아납니다.

그렇게 히브리인들에게서 죽은 자의 얼굴에 산 자의 얼굴이 포개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사라의 얼굴을 포개었다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또한 이 땅의 삶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부활신앙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요,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나그네란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영원히 자신이 거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1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는 장막에서 거하며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이 자기가 딛고 있는 이 세상 속의 가나안이 아닌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다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서 거한 것이며 한 평의 땅도 구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막 생활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로 말한다면 월세나 전세에 해당하는 거주 형태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기는 했지만 풍성한 재물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도 애굽의 바로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내 나그네 세월이 130년이라고 자신의 인생을 요약하여 밝힙니다.(창47:9) 

뿐만 아니라 다윗도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말합니다.(시139:12)

야곱도 많은 재물이 있었고 다윗은 권력까지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거류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갔습니다.

 

나그네란 표현만큼 신자의 위치를 잘 나타내고 있는 표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나그네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초연하게, 겸손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기     도 

 

 

이 땅이 다가 아니라는 나그네 의식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2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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