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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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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10. 2. 00:00

<창세기 8:6~19> 구체적인 말씀이 없을 때?

 

 성경말씀 : 창세기 8:6~19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말씀묵상 

성도라면 당연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수월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인데, 문제는 성경이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모두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명문화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 행하는 것이 때로는 애매모호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아가 그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확실히 해 주셨는데 방주에서 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이 없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됨으로 노아는 지구를 뒤 덮었던 물이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방주가 산에 내려 않을때 노아는 이제 곧 방주를 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방주를 나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방주를 건조하고 승선할 때와는 달리 방주에서 나가는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구체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방주에서 나가는 문제를 한번이라도 말씀해 주셨다면 차라리 속 편하게 기다릴 수 있을텐데, 방주에서 나가는 문제에 관한 것은 그 시기와 방법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명문화 되어 있는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기에 노아는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행동을 보십시요.

아무리 답답해도 노아는 방주의 문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발자국도 밖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방주에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 보내어 물이 얼마나 감했는지 바깥 사정을 알아 봅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밖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으로 까마귀와 비둘기를 선택할때 노아는 그 새들의 특성을 고려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지각을 지혜롭게 잘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이러한 행동은 일면 비신앙적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잘 감수했던 노아의 믿음과는 모순되어 보이는 행동 같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 명문화된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판단하여 분별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지각과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훈련을 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과 이성을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이성적인 것이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이성도 신앙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지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부여받은 그 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 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지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신앙제일주의를 반이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일반은총의 영역을 무시하는 것이 마치 신앙생활 잘하는 것인양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만큼 비상식이 통용되는 곳도 없는 듯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코 비상식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명문화된 성경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경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기가 애매모호한 경우를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건전한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훈련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내 보내는데 7일 주기로 보냅니다.

7일의 주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시간의 단위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7일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무의미하게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묵상하며 홍수 후에 펼쳐질 세상이 하나님이 원레 창조했던 안식의 그 세계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며 방주 안에서 7일을 한 주기로 생활한 것입니다. 

이러한 7일 주기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적용하여 7일 단위로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땅에 물이 완전히 마른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즉 노아는 평상시에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었기에 올바른 판단과 지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성과 지각을 사용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말씀에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만이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큐티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기     도 

점점 복잡해지고 다원화 되어가는 사회아 다양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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