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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9. 28. 00:00<창세기 7:1~5>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신 이유
성경말씀 : 창세기 7:1~5 |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말씀묵상 |
120년 전 심판의 경고와 함께 방조 건조를 명령하신 하나님은 이제 방주에 들어가라는 두번째 명령을 내림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임박했음을 긴박하게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두번째 명령은 방주를 예비하라는 첫번째 명령과 거의 120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어간의 노아의 행적에 대해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고 한 구절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로 120년간의 노아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순종한 노아에게서 의로움을 보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근거는 순종이라는 노아의 행위일까요?
노아가 120년이란 긴 세월을 묵묵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심판이 있을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분명히 노아가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를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1:7)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가 오용되어 삶에서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 죽어 있는 믿음인지를 늘 살펴 보아야 할것입니다.
2절을 보면 방주에 들어가는 짐승가운데 부정한 것은 암수가 두 쌍 인데 비해 정결한 것은 암수 일곱 쌍을 취하라고 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 부정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처음으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셨습니다.
이 구분은 모세 시대에 가서 더욱 구체화 되고 체계화 됩니다.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분류는 경건한 후손들을 구별시켜 그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들을 볼때마다 너희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노아때 이 일을 하신 것은 노아의 홍수가 악한 세대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의의 후손들을 악한세대와 확실히 구별시키는 분리 작업의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방주에 들어갈 동물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셨습니다.
우선 모든 생물을 한 쌍씩 취하신 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왜 정결한 짐승은 암수 7쌍씩 더 많이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바로 그 이유는 제사를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의미합니다.
정결한 짐승은 종족 보존뿐 아니라 제사용으로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을 취하여 번제를 드린 사실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사는 방주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배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방주 안은 분명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야성을 지닌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서 근 일년의 시간을 지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그 동물들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것이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냄새나고 시끄럽고 답답하고 이 모든 것들이 방주 안의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을때 동물들은 야성을 잃고 순해지며 약육강식의 원리가 그들을 지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동물들 사이엔 평화와 기쁨이 공존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 방주 안의 생활입니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첫사랑 때의 그 기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덧 사라지고 냄새나고 불편하며 좁은 방주 안의 현실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없다면 신자의 삶만큼 불쌍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이야 세상을 마음껏 즐기기라도 하는데 우리는 세상을 마음껏 즐길 수도 없습니다.
방주 밖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고 살아 갈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유지 시킬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종족 보존을 위한 짐승과, 제사를 위한 짐승 모두를 취하는 삶이 요구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곧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육신의 양식들을 얻기 위해 성실히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종족 보존에 필요한 한 쌍만 취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양식을 얻는데 올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쌓아놓고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배자로의 삶을 위해서는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7쌍을 취하라고 하십니다.
7쌍과 1쌍의 비교는 단순히 산술적 차원에서의 더 많고 적음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은 ‘온전’ ‘완성’ 이란 의미가 담긴 수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통째로 온전히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제사 지낼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취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살기 위하여 날마다 정결한 짐승 7쌍을 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 도 |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께 드려서 날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7: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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