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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23. 00:00

<창세기 40:9~23 (2)>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애굽의 꿈 해석법

 

 성경말씀 : 창세기 40:9~23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말씀묵상

 

술 맡은 관원의 꿈 해석을 들은 떡 맡은 관원은 자신의 꿈도 길한 것이라 여기고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래서 “나도 꿈에 보니” 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대 애굽의 꿈 해석 문서에 보면 흰떡을 보는 꿈은 길한 징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떡 맡은 관원도 당시에 유행하던 꿈 해석법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생명이 위태위태한 워낙 어려운 상태에 있다 보니 길한 징조로 보이는 흰떡의 꿈도 그의 마음에 안심을 주지는 못하고 그를 불안과 근심으로 몰고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의 꿈 해석이 감옥에서 나가는 내용임을 듣고는 길조의 상징인 떡을 본 자신의 꿈도 분명  좋은 내용일 것이라 기대를 가지고 요셉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 해석은 떡을 길조라고 여겼던 애굽의 꿈 해석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떡을 본 것 가지고는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오히려 죽음을 당한다고 말해줍니다.

요셉의 꿈 해석은 오직 포도나무 열매의 즙을 짜서 자신의 빈 잔에 부어야만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으로만 진정한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셉의 꿈 해석은 애굽의 가치와 사상과 학문 전체를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꿈 해석법은 그 당시 학문을 집대성 한 것으로 그 안에는 애굽 사회를 지배하던 세계관과 사상이 그대로 녹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꿈 해석법 안에는 인간의 지혜와 학문, 능력, 인간이 쌓아온 업적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결국 흰떡 본 것을 길조라고 여기는 애굽의 꿈 해석법은 포도나무 열매의 즙을 빈 잔에 담는 것뿐만 아니라 애굽이 이루어놓은 모든 업적들로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떡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헛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거짓 희망을 심어줍니다.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업적으로도 감옥같은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는 애굽의  꿈 해석법은 바로 아담 하아가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요, 가인이 자신의 생각과 행위로 제사를 드린 행위이며, 바벨탑을 쌓아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했던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말해 줍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애굽의 꿈 해석법이 점철되어 온 역사입니다.

아담 이래로 인류는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해 왔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마음이 부풀어 사람들은  인간이 쌓아 놓은 행적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서 몰아내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그 믿음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선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오히려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을 했으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여전히 인간은 돈과 과학 기술로 더 높은 바벨탑을 쌓으며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 이 감옥같은 세상을 탈출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현대판 바벨탑을 세우는 일에 그리스도인도 부화뇌동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사후에 천국가는 구원은 예수님의 공로와 능력으로 받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주님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며 인간의 능력으로 그 자리를 채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삶속에서는 주님이 세워주실 유토피아가 아닌 돈과 학벌과 인간의 능력이 가져다 줄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에덴동산에서의 사단의 속삭임은 오늘날도 여전히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얘기하며 그 능력을 계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근저로 하는 현대의 심리학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과 선의 가치를 높이 세우며 죄를 단지 심리적인 현상으로, 인간이 가진 부족함 가운데 한 가지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인 관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며, 교회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사죄의 은총을 경험함이 없이도 마음에 평안과 희망을 주는 거짓 복음이 점점 교회 안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는 이방종교에서도 종교적 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위안과 소망을 얻듯이 교회 안에서도 그런 현상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애굽의 꿈 해석법은 오늘날도 전방위적으로 우리의 삶과 의식세계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 아닌 다른 것들로도 인간의 마음에 평안과 기대를 줌으로써 사단은 지금도, 이 감옥을 빠져나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과  선함이 우리 인간 안에 있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기     도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유토피아의 삶을 가져다 줄 것이란 믿음이

우리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4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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