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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24. 00:00<창세기 40:18~19>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
성경말씀 : 창세기 40:18~19 |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말씀묵상 |
이제 요셉은 애굽의 꿈 해석과는 반대의 하나님께선 주신 계시를 이야기합니다.
술 맡은 관원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대로 전합니다.
충격받을 사람을 배려해서 사흘 후에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라고만 얘기해도 될 것을 참수를 당하며 그 시체를 새들이 쪼아 먹을 것 까지도 그대로 얘기해 줍니다.
그 죽음의 방법까지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떡 관원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듣고 있는데 거기에 대 놓고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무척 잔인해 보입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요셉이 상대에 대해 매우 배려심이 없는 것 같고 지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처세술이나 인간관계 같은 관점에서 보면 안됩니다.
아마 요셉도 인간적으로는 그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마음 아팠을 것입니다.
조금 더 완곡한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이 꿈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일점일획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이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해석자는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감동 받은바 사실대로 해석하고 가감 없이 전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기를 꺼려합니다.
지금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의 꿈 해석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신 것이며 떡 맡은 관원의 꿈 해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 모두를 말씀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을 생각하여 사랑의 하나님만 얘기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인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말씀 그대로를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만큼 공의의 하나님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비록 현대인들의 정서상 그 내용이 아무리 거스를지라도 복음을 전할 때는 지옥의 무서운 형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떤 것인지를 반드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으면 신앙이 유아기 상태에서 머무르며 이기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의 출발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인생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복음을 받아들여도 지옥의 형벌 때문이라는 이유보다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라고 얘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원색적인 십자가 복음을 듣기 거북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얘기할 때 완곡하게 들리도록 시도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일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에 인간의 지혜를 사용하는 것은 전도의 효율성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현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하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침묵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떠하든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그 마음 자체는 귀한 것입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가능한 한 지혜로운 여러 방법을 간구하는 것이야 좋은 것이지만 복음을 지혜롭게 전한다고 하며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행위이며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테크닉이 탁월하거나 설득력 있는 언변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일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 유다 왕국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유다 왕국이 결코 이방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이라며 백성들에게 거짓 평안 거짓 희망을 심어 주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격려와 위로 메세지에 소망을 두고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이라는 당신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을 주실 때 “네가 가서 나의 말을 전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않을 것“ 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이 예레미야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 백성에게로 보내며 나의 말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듣지 않을 것이 뻔한데 굳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레미아를 놀리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그 말씀이 그대로 심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선포할 때에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나 효율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하는데 관심과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성령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그저 받은 말씀 그대로를 가감없이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청중과 상대방을 의식하게 될때 사람들의 좋아하고 부담 갖지 않는 말씀을 주로 전하게 되며 성경을 보는 관점과 해석도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원하는 방향에서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격려와 위로를 주는 제사장적인 성경구절과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책망과 채찍으로 우리의 심령을 쪼개며 부담을 주는 선지자적인 설교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곳으로 사람들은 모여 듭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는 오늘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의식이 교회까지 점점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인관계나 교육의 효과 측면에서는 분명 순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대 심리학과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철학에 잠식당하면 말씀에 대한 편식은 더 심해지게 됩니다.
자기 입맛에 당기지 않는 말씀은 모두 골라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기 도 |
하나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며 받아들이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4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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