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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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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8. 00:00

<창세기 38:1 (1)> 요셉 이야기 연장선상에 있는 유다의 기사

 

 성경말씀 : 창세기 38:1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말씀묵상

 

창세기 37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그리고 창세기 39장 1절을 보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38장을 빼고 39장으로 연결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38장에 갑자기 요셉의 기사와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유다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기사는 요셉의 이야기와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요셉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성경이 그것을 야곱의 족보라고 표현한 것은 요셉의 생애가 야곱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생애도 야곱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또 다른 측면에서 다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시고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재확인 시켜주신 언약의 핵심은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권자가 세워졌으니 국가를 세우기 위한 나머지 요건을 채우려면 백성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 백성과 영토로 선택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 땅이요 이를 위해 불러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후손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약속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생애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방 땅에서 종 되었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는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 될 수 있는 토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반면에 유다의 생애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라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다의 계보를 통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말이라는 한 여인이 희생함으로 타락한 유다의 집안이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 가는 유다의 기사는 자신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 받게 되는 요셉의 삶 전체를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유다의 기사는 요셉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38장에 묘사된 유다의 기사는 상식과 윤리의 관점에서 볼때 너무 수치스러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서 읽지 않고  넘어 가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38장의 유다와 다말 기사때문에 기독교 초기시절 유교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폄하 하며 조소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성경의 진정성을 반증해 줍니다.

성경이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어진 것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록했다면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자를 깍아 내릴 수 있는 내용들은 오히려 삭제를 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존심 강한 이스라엘 민족 특히 유다지파 사람들에게 38장은 얼마나 치욕스러운 기사이겠습니까?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도 유다지파는 유달리 선민의식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을 개같이 여겼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족보에 이방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이 시아버지와 관계를 하여 낳은 자손들이 자신들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기사를 그냥 두었겠습니까?

분명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수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사들이 하나도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전수되어 왔습니다.

마지막 성경의 정경이 확정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에 수치심을 안길 수 있는 이러한 기사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이 영감으로 기록된 것일 뿐 아니라 전수되고 정경으로 확정되는 모든 순간에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유다와 다말 기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지혜와 상상을 뛰어넘어 은혜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할때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그리고 추하고 비천한 자리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심연 밑바닥에 있는 수치까지 몽땅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자랑은 모두 무너지고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종교와 도덕으로 쌓아올린 그들만의 아성, 자존심들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구약성경, 특별히 창세기 38장과 같은 본문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묵상했다면 그들에게 찾아오신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분을 영접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영광은 결코 인간의 탁월함과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인간이 자랑하고 높이는 것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오직 그 안에서 자랑되는 것은 십자가로 인한 은혜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십자가 이외의 것으로 인간의 자랑거리와 자존감을 삼고자 한다면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나도 모르게 배척할 수도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기     도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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