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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2. 20. 00:00<창세기 35:9~11> 명분상의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성경말씀 : 창세기 35:9~11 |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묵상 |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이 다시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벧엘에 올라와 과거의 언약을 기억하며 단을 쌓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축복 약속이 재확인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35:9)
야곱의 새 출발을 격려합니다.
야곱은 지금 밧단아람이 아닌 세겜에서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표현합니다.
세겜에서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편의에 따라 살아온 세겜에서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겜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고,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삶만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편의에 따라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서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깨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나중에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나중에 심판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행적을 기억하고 칭찬 하실 수 있도록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새로운 이름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새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35:10)
이름은 그 사람의 전인격을 담고 있는 표징입니다.
그의 새로운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의 전인격이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과의 언약에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지배하신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이제 언약의 후계자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하며 싸우는 자’라는 새로운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이는 자, 발뒤꿈치를 붙잡은 자’의 의미를 가진 “야곱”의 이름처럼, 온갖 오욕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기만과 술수로 얼룩진 지난날의 삶을 더 이상 추구하지 말고 청산할 것에 대한 요청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의 씨름 후에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다시 그 이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브니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부를 것이라고 표현한데 비해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되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브니엘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른 것은 야곱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브니엘의서의 씨름 사건 이후의 33장, 34장에서도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표기되지 않고 계속하여 야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 명분상으로는 이스라엘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야곱의 삶을 살아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오늘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부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명분상의 이스라엘이 아닌 수준 차원에서의 이스라엘로의 삶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벧엘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야곱에게 영적 부흥을 일으키신 것은 바로 야곱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벧엘에서의 하나님 임재 체험은 브니엘서의 하나님 임재 체험과는 그 성질이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벧엘의 사건을 성막으로 설명한다면 성막의 뜰과 성소를 지나 성막 가장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벧엘에서의 부흥회를 통해 야곱을 더욱 성숙한 단계로 업그레이드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는 하나님의 경험이 서로 다른 것이 바로 각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나 영적상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후부터 성경에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계속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이스라엘 두 가지 이름을 병행하며 기록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삶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부흥을 겪은 이후에 그의 삶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그의 삶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야곱의 모습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야곱의 인생이 곧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족장들 가운데서도 특히 야곱의 일생을 많은 부분 할애하여 성경에 기록해 놓았을까요?
그것은 지렁이 같은 야곱의 삶이 우리의 삶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명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나타날 때보다는 내가 지닌 각자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이 온전한 이스라엘의 인생이 되도록 끊임없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 말씀하시고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 즉 엘 샤다이 라고 당신의 속성을 계시하십니다.
‘엘 샤다이’ 이 표현은 성경에서 지금 처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야곱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전히 들어오지 못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왕의 통치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확신할 때입니다.
그 지식과 확신이 없을 때 그 사람이 통치에 완전히 순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 샤다이라 고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당신이 정하신 목적과 목표를 반드시 이룰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즉 야곱을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에 함께 하시니 비록 험난하고 힘들지라도 그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언약을 재언급하시며 그 약속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증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 약속을 하시는 분이 전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된 이스라엘이 되기 위한 여정을 소망가운데 지나야 할 것입니다.
기 도 |
명분상의 하나님 자녀가 아닌 수준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 자녀란 이름을 지니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5: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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