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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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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2. 23. 00:00

<창세기 35:16~29 ②> 라헬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성경말씀 : 창세기 35:16~2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말씀묵상

 

벧엘에서 영적부흥을 경험한 야곱은 이제 하나님께서 명하신 최종 목적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으로 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도정에서 에브랏 곧 베들레헴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이르러서 베냐민을 해산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라헬을 그리고 있습니다.

베냐민을 낳음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는 근간이 세워졌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베냐민의 출생 사건은 부족하고 미완의 이스라엘이 완성 되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라헬이 베냐민을 낳은 과정은 고통의 과정이엇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죽어가면서 아이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 로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베들레헴 가는 길에 묻혔습니다.

사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과 애통속에서 고통을 겪다 마지막에는 아이를 낳다 통곡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라헬의 고통과 통곡은 한 개인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의 그림을 여러 곳에 붙여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 말씀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침공을 당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고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라마는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마지막으로 집합했던 포로들의 최종집결지입니다.

먼 이국 땅으로 끌려가는 자식들을 바라 보며 애통하는 어미의 심정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라마는 자식을 낳기 위해 고통을 겪다 죽은 라헬이 묻힌 곳이며 베냐민 지파의 땅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성경이 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자녀들에 대한 어미의 애통을 라헬의 애곡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라헬이 통곡하며 죽은 사건과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자녀들을 보고 애통하는 어미들의 사건이 영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포도들의 집결지와 라헬의 묻힌 곳이 같은 장소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통해 구속의 진리를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시기 위해 동원한 하나님의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가 되는 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징계라기보다는 진정한 이스라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31장 16절부터 하나님께서는 통곡하고 있는 어미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세지를 전해 주십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너희의 자녀들이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 고토를  회복시킬 것이라 말씀하시며 그러니 더 이상 슬퍼 울지 말고 이 사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라헬은 선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인 야욕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내가 되어 언약의 축복 안에 들어는 왔지만 그녀의 삶은 전혀 언약 안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라헬의 모습은 바벨론 포로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포로가 되는 것이 슬픔이요 통곡의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야만 새로운 이스라엘로 회복될 수 있었듯이 라헬도 죽음을 통과하는 애통과 통곡이 있을 때 바로 베냐민의 출생 곧 이스라엘의 완성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베냐민을 낳음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완성을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베냐민을 낳는 라헬이 죽음에 이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라헬이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라면 라헬의 고통과 통곡 속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 바로 완성된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언약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지만 우리의 의식과 삶은 여전히 이 세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라헬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의 고통을 통과함으로 이스라엘로서의 완성된 모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베냐민을 낳게 하시면서 라헬을 죽음의 고통으로 몰고 가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내 자신이 죽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큰 고통과 통곡 소리를 수반해야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언약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차피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옛 자아를 죽이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과정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혹 그 과정에 들어가서 자신의 삶과 심령에 통곡소리가 들린다 할지라도 포로로 끌려가는 자식들을 위해 통곡하던 어미들에게 들려 주셨던 소망과 위로의 메세지를 기억하십시요.

 

 기     도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과정에서 슬픔과 통곡소리가 들린다 할지라도

소망 가운데 그 길을 걷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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