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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1. 20. 00:00<창세기 29:31~35 ②>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레아
성경말씀 : 창세기 29:31~35 |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말씀묵상 |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보통 라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는 구속사의 주인공은 레아라는 사실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는 단순히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는 두 여인의 질투와 경쟁을 묘사한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에 왜 여인네들의 싸움이 지리하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거기엔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댜.
두 여인의 이야기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부터 말마암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를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 33절에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음을 연이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레아가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레아에겐 라헬에 비해 내세우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야곱이 레아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라헬과 싸우고 난 뒤라든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레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겠습니까?
라헬에 대한 야곱의 지독한 사랑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이었을 뿐입니다.
동족의 혈통 안에서 배우자를 고른다는 똑같은 전제하에서도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고를 때의 선택 기준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라헬에 대한 야곱의 편향된 사랑은 라헬을 기고만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레아가 첫째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라헬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임시촉진제와 같은 합환채같은 귀한 물건으로 거기에 대한 합당한 보상까지 해야 했습니다.
왜 레아는 이렇게 버림받은 자로 살아 갔을까요?
예수님은 레아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그 계보를 통해 나오는 예수님과 경건한 후손들이 걸어야 할 길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하나같이 이방인이요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진정 복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족보의 여인들은 레아의 또 다른 그림입니다.
레아는 바로 그 여인들의 원시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해 비참하고 한에 사무친 상항에 처해 있지만 그녀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합니다.
그래서 라헬보다 먼저 많은 자녀를 갖게 되고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갈 유다를 생산합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이를 낳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낳는다는 표현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예수님이 임재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핍박이 따르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거하게 됩니다.
이 그림이 인간의 사랑을 못 받았던 레아가 약속의 후손의 라인인 유다를 낳는 그림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막벨라의 무덤에 묻힙니다.
야곱도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닌 레아와 함께 열조의 무덤에 묻힙니다.
성경은 지금 진정한 복은 인간에게서 받는 사랑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자가 복 받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한 것이라 순위 매겨놓고 상위의 것들을 성취한 자들이 하위의 것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업신여기며 홀대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순위를 좇아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 다닙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은 가치와 기준에 따라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위치에 있고 그러한 직업에 종사할지라도 저들이 정해 놓은 기준때문에 위축되거나 낙담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와 상황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호와만 바라본다면 저들이 세워 놓은 기준과 가치들이 성도 앞에서는 힘없이 허물어져 버릴 것입니다.
성도의 복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가 아닌가로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이 여기기 계신다는 그 복된 소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권세와 명예와 재물과 학벌을 존귀히 여기고 지독히 사랑하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우리를 업신여기며 비웃을때에 거기에 당하지 마시고 그 가치와 기준들을 오히려 조롱하며 살아 가십시요.
우리는 여호와의 긍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 도 |
세상이 우리를 조롱해도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입어 그 모든 것들을 이기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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