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qtman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Rss feed Tistory
구약 QT/창세기 2022. 12. 5. 00:05

<창세기 25:12~18> 이스마엘의 족보가 갖는 의미

 

 성경말씀 : 창세기 25:12~18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말씀묵상

 

본문에서 이스마엘의 족보가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할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여주인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하면서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 16:10)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실 때에도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시행하면서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창 1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여 쫓겨날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고 재 확인하셨고, 하갈이 이스마엘과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8)고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는 바로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시작할때 서론 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일차 목적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그것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이 족보를 읽고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성들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스마엘 자손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 하신 약속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시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적통인 자신들에게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너의들은  보았느냐?'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의 성취가 이렇게 이루어졌다'

하물며 언약의 계보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을 향한 언약의 성취는 말한들 무엇하겠느냐?

그러면서 성경은 이제 막 시작하는 언약의 후손, 이삭을 기대하고 고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 이삭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약속을 이뤄가시는지 보라고 독자들을 북돋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후손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노아 홍수 후에 약속하신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와 비를 주시고 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된 너희일까보냐 왜 먹고 사는 것때문에 근심 걱정을 하느냐? 

왜 앞에 놓인 문제에 짓눌리고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또한 본문은 이스마엘의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상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표현한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와  동일한 뜻입니다.

그 원문의 정확한 번역은 “그의 백성에게로 합류하였다” 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족장의 죽음을 표현한 “열조에게 돌아 갔더라” 는 의역한 번역이고 오늘 본문의 표현이 직역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의 죽음을 가르킬때 사욯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도 구원에 반열에 들어갔다 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계보상으로는 메시아의 계보에서 벗어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마엘은 할례을 받은 자엿습니다. 

당시에 이삭의 계보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의 집에 기거하던 종들일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의 언약의 범주 안에 속한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은 당연히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고 이삭과 이스마엘은 좋지 않은 관계였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선입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장례를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치른 것을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 관계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우기 에서는 이삭이 가나안 여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이스마엘의 딸을 취해 지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창28:8-9) 

이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집안이 상당히 돈독한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마엘 자손이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의 화약고가 중동이라고 할 마큼 유대인과 아랍민족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이삭의 계보인 그리스도인들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이슬람인들의 관계는 가장 적대적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마엘에 대한 선입관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왔기때문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십자군 전쟁때와 같이 이스마엘 후손을 색안경 끼고 무조건 악하게 보는 경향들이 있어 왔습니다.

 

성경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대비 시키며 이스마엘이 이삭의 원수인양 묘사하고 있는 것은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모델로서로서의 그림이지  이스마엘 개인을 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적으로 이삭의 씨인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오신 메시아를 배척했습니다.

진정한 약속의 계보에는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래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을 묘사한 “열조에게 돌아 갔더라” 라는 표현을 동일하게 이스마엘의 죽음에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 보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기저에는 이러한 경향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비슷한 생각들을 해 왔습니다. 

이삭의 계보에 속하지 못한 이스마엘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후손인 오늘날의 이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선입관을 가진 태도때문에 저들이 우리에 대해 그렇게 적대적으로 된 것입니다.

 

이슬람교에 구원이 없고 복음에 적대적이라고 해서 그곳에 속한 사람들까지 적대시 하지 말아야합니다.

분명히 그 안에도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 마인드를 가져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예수를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래서 아예 전도를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중에도 하나님의 택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입관을 벗어 던지고 사람들에게 다가 가야 합니다.

“저놈은 도저히 예수 믿을 자가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스마엘이 될 수 있습니다.

 

 기     도 

 

 

 

선입관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다가 서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25:19~21

 

,
TOTAL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