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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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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출애굽기 2017. 7. 17. 00:00

<출애굽기 12:1~14 (2)> 두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는 의미

 

 성경말씀 : 출애굽기 12:1~14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말씀묵상

하나님이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양의 잡아 그 피를 바르라고 한 곳이 집의 입구인 대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문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그 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문 가운데서도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즉 대문을 떠 받치고 있는 옆의 두 기둥과 위의 기둥, 세 곳에 피를 바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 곳에 모두 피를 발라야 했습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빼고 바르지 않으면 재앙에서 건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피를 기둥 한곳에만 바르도록 했어도 될을터인데 왜 굳이 세 군데나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서 발생합니다.

구주로 영접할 때 반응하는 것이 인간을 상징하는 인격입니다. 그

래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반응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따라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죄인이란 실존적인 자각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적으로 말한다면 대문에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에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격은 3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대문의 3곳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 3곳 모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바로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의 인격의 모든 요소에서 주님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하여 분명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정말 인격의 3요소 모두에 주님의 피가 발라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성에만 십자가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에 대한 지적동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존재도 믿고 십자가의 사건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의 특징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줄을 믿느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분명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인류의 죄를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의 믿음이 바로 지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감정에만 피를 바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감성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감성을 터치하기 위해 예배의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파괴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성이 가장 쉽게 발휘하는 곳이 우리의 인격에서 감정입니다.

비트 빠른 찬양과 드라마와 멋진 음향, 조명등으로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 사람의 저변에 깔린 종교성을 발로시킵니다.

거기에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실존적인 자각이나 십자가 사건의 의미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것이든지 내가 종교적이고 영적인 느낌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받은줄 알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셋째는 의지에만 피를 바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산상수훈과 같은 기독교의 높은 윤리와 도덕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과 의미보다는 예수님을 자신들이 따라야 할 모법적인 스승이라고 여깁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슈바이쳐 박사입니다.

그는 분명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고 아프리카에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예수는 구약부터 약속되어온 성경이 말하는 그 메시아가 아니라 모범적인 도덕 선생으로서의 예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 사건을 평하기를 예수님의 유대주의적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희생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결단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구약의 제사제도는 유대인들의 저급한 종교심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 모두에 예수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때에는 그분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을 습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머리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까지 가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는 지식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감격과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지식은 우리의 감정으로 하여금 기뻐 뛰며 흥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와 감격의 감정은 결국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데까지 나아가게 하는 결단과 의지를 갖게 합니다.


이렇게 온전한 구원이란 인격의 3요소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두 문설주와 아래 인방에 피를 바르는 의미입니다.

 

 기     도 

우리의 전 인격이 주님께 반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일말씀 : 출애굽기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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