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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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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9. 27. 00:00

<창세기 6:9~22 ②> 방주 설계에 담겨진 의미

 

 성경말씀 : 창세기 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말씀묵상 

홍수 심판은 인간뿐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범죄한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피조물의 대표라는 대표성의 원리가 노아 홍수 심판에도 적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생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각 개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방주 안에 들어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주는 전적인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노아는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명령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방주의 모양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숨어져 있습니다.

노아에게 주신 방주의 설계도 안에는 실용적 측면을 배려함과 동시에 영적인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영적축복의 원리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방주의 전체 수치입니다.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각각 300규빗, 50규빗. 30규빗이었습니다.

실용적 측면에서 이 사이즈는 구원받은 인간과 생물들의 숫자를 수용하기에 적당한 것이요 그 비율은 조선공학적 측면에서 가장 안정성 있는 설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치수에 담긴 영적원리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3은 삼위 하나님을 의미하고 5는 은혜와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숫자는 성막제조시 번제단의 치수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번제단의 사이즈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규빗, 5규빗, 3규빗임)

방주와 번제단은 모두가 십자가의 피를 통한 구속을 의미하는 영적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은 완전함을, 100은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300과 50과 30의 치수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은 방주 안에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와 구속이 충만히 담겨있다 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요.

그 은혜의 정도는 죄악에서 건지심뿐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실 만큼 충만하다는 것을 치수를 통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역청을 바르라는 것은 실용적 측면에선 나무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청은 원어상 덮다는 뜻과 어근이 동일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역청이 죄악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역청은 주님께서 흘리신 피입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건조된 방주 안에 들어와 있어도 역청이 완전하게 칠해져 있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이 새어 들어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넘실거리는 세상의 물결에 의해 완전히 잠식을 당할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자라나고 좋은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종교성으로도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이 교리적 지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다가 와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실존적 자각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거거에서 흘리신 보혈로 자신의 심령을 적시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청을 바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의 감격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때  죄악된 이 세상의 모든 물결이 우리의 심령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청을 온전히 바르지 않을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종교생활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방주에는 키와 노가 없습니다.

실용적 측면을 생각하면 네 명의 장정들의 힘을 덜어 주신 것입니다.

만일 남자 네 명이 그렇게 큰 배의 노를 젓은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방주를 운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방주안에 일단 들어가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배가 어디로 가든지 너희가 신경쓰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창문을 배의 지붕에 내시라고 하신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입니다.

실용적 측면에서 창문은 공기 소통을 위해서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은 옆으로 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높은 지붕 꼭대기에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밖을 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쯤인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이것이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시고 가라하시면 근심없이 떠날 수 있는데 확실한 것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가오고 있는 하늘만 물끄러미 보일 뿐입니다.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벽에 사방이 막혀서 어디쯤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그 방주안에서 평안히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란을 떠나라고 명령하실때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고만 하셨지 가나안이라는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비전이나 청사진을 제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해 가는 이 방주 안에는 키도 노도 창문도 없습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 우리를 짓누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손수 우리의 일생을 운전하고 계시니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믿고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안히 쉬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가운데 뿌리내리기를 바랍니다.

 

 기     도 

우리의 심령을 주님의 흘리신 피로 홍건히 적셔 주시사

날마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넘쳐나게 하소서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오리무중 같을지라도 선하신 아버지만을 신뢰하고

우리의 일생을 당신께 맡길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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