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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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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22. 00:00

<창세기 40:9~23 (1)> 우리의 잔을 비워 놓아야 합니다.

 

 성경말씀 : 창세기 40:9~23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말씀묵상

 

요셉을 신뢰함으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은 자신들의 꿈을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술 맡은 관원의 꿈입니다.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다음에 떡굽는 관원의 꿈입니다.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세 가지와 세 광주리는 사흘을 뜻하며 사흘 후에 술 맡은 관원은 복직되어 바로 앞으로 나가게 될 것이며  동일한 사흘 후에 떡 굽는 관원은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를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요셉이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해석대로 술맡은 관원은 바로 앞에 나가게 되었고 떡 굽는 관원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요셉이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하여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만 말하려면 굳이 성경이 꿈의 내용까지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꿈의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한 것은 이 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 맡은 관원이 그 꿈을 꾸고 나서 감옥에서 나가 살게 되었듯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죄의 사슬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려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 맡은 관원의 꿈에 먼저 포도나무가 나타납니다.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포도나무가 세 가지가 있었다는 것은 사흘만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관원이 포도나무에 열린 열매에서 즙을 짜서 잔에 담았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자신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꿈에서 보면 포도나무 세 가지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 과정이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즉각성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은 에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사역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즉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 맡는 관원의 잔은 비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무 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빈 잔을 오직 포도의 열매에서 짠 즙으로만 채웠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어떤 공로나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워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 비워진 심령에 오직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반면에 떡 맡은 관원의 꿈은 그를 사망에 내 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떡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성막제도에서 성소에 차려진 떡상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가장 위에 광주리에 떡이 아닌 떡 관원이 구운 각종 다른 종류의 식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관원은 밑에 두 광주리에 떡이 있으니 맨 위에 광주리는 좀더 다양한 메뉴를 준비하여 왕에게  바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식물들은 왕에게 가기 전에 새들이 와서 다 쪼아 먹었습니다.

여기서 세 광주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사흘만에 부활하사 이루어 놓으신 구원사역을 말한니다.

그런데 그 구원사역에 무엇인가 더 보태고 싶어 맨 윗 광주리에 인간이 구운 각종 식물을 담았습니다.

아마도 그 관원은 자신의 정성이 들어간 다양한 메뉴의 식물을 내 놓으면 왕이 더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식물은 왕이 아닌 새들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에게 그 음식들이 가지 않앗습니다.

그래서 떡 맡은 관원은 죽음에 내 던지어 졌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인간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못견뎌합니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행적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내 정성이 들어간 만큼 하나님도 감동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의 공로뿐입니다. 

그 나머지 인간이 자랑하여 내 세운  모든 것들은 사단이 좋아하여 사단의 먹이가 되는 것뿐입니다. 

궁극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감옥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한 윤리 도덕 차원의 행위 개념으로만 국한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의 육신의 삶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들 (돈, 권력, 학벌, 재능...)이 모두 인간의 공로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육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인간이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늘 잊고 살아갑니다. 

구원은 예수님 공로로 받았지만 이 땅에서 육신이 살아가는 데에는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축소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전 우주적인 것입니다.

 

구원을 생각할때 좁은 의미의 구원만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죽은 이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것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기껏 구원 받았다고 해 놓고서는 여전히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닌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노력과 내 의지와 내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이제 삶의 전 영역에서 그분을 주로 인정하고 그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의지하고 신뢰한 인간의 능력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학벌을 의지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의 꿈에서 본 잔이 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잔에 다른 것이 채워져 있었으면 포도에서 짠 즙을 담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우리 삶에 취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의지하고 신뢰하던 모든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분명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리도 삶에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재물이 많아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은 세상 사람도 그리 합니다. 

성도가 풍성함을 누리고 사는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풍성함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어서 누리는 풍성함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풍성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세상의 풍성함을 보고 그리도 침을 흘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잔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의 잔속에는 인간이 자랑하는 것들로 많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실 빈 자리가 없습니다.

 

포도에서 짠 즙을 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잔을 비워 놓아야 합니다.

 

 기     도 

 

 

 

 

우리의 잔을 비우고 주님으로만 가득 채우게 하사

구원의 풍성함을 우리 인생 가운데서 항상 누리며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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