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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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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17. 00:00

<창세기 39:7~18> 내 안의 보디발 아내

 

 성경말씀 : 창세기 39:7~18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말씀묵상

 

오늘 본문은 보디발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들어가기에 앞서 6절 말미에 보면 “요셉의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잘생긴 외모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고 번역된 구절의 원문상의 뜻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외모’ 로 번역된  ‘토아르’는 형상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상이란 것은 단순한 외모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적 모습 즉 내면의 인격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라고 번역된 ‘야페’ 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에서 ‘좋았더라’ 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된 피조세계에 대한 완벽한 아름다움과 조화를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야페는 외모가 잘생겼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절대 온전하며 완벽하게 아름다운 형상을 지니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에 대한 이 표현은 예수님을 의미한 것입니다. 모든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요셉의 삶은 요셉 자신의 생애이면서 또한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그분의 속성과 사역을 그리고 있습니다.

보디발 아내가 요셉에게 관계를 맺자고 간청한 본문의 기사도 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영적인 진리들의 풍성함을 깊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표면적 의미가  요셉의 외모가 여인의 성적 쾌락과 유혹의 좋은 조건이듯이 그리스도가 지니신 완전함과 풍성함이 우리의 정욕을 위한 삶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완벽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완벽함은 보디발 집안의 복과 풍성함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안에 내려지는 복은 모두 보디발의 아내인 그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 집안의 모든 복과 풍성함을 누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적 쾌락을 탐하는 것만은 남편인 보디발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요셉으로 인해 주어진 보디발 집안의 모든 복과 즐거움 가운데 요셉의 외모로 인한 정욕 채우기만은 허락되지 않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허락되지 않은 그 즐거움을 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모든 식물을 두고도 선악과에 매료되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하와처럼 말이죠.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완벽한 모습에서 성적인 쾌락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완벽한 요셉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질 자신의 집안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유대인들은 그분에게서 완전하고 풍성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모습에서 정지적으로 강력한 이스라엘을 꿈꾸었고 주님의 모습에서 육신의 빵의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본래 목적인 구원과 그를 통해 온 세상이 받을 복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의 풍성하심과 완전하심을 사모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는 예수님의 신적인 완벽함에 매료되어 정욕의 배를 채우고자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왕이 되어 달라고 주님을 졸랐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완벽한 외모를 보고 반해 자신의 성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려고 동침하자고 졸랐듯이 예수님의 신적 풍성함에 매료된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과 연합하자고 주님께 졸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의 왕이 될 것을 거부하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여 감옥으로 몰고 갔듯이 주님을 십자가로 몰아 붙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왜 요셉을 모함했습니까? 

자존심이 상함으로 인한 분노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왕으로 삼자고 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육신의 정욕을 채우고자 했던 자신들의 요구가 거절될 때 일어나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분노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집안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집안에 내려지는 복은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보디발의 집안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신 풍성함과 전능함에 매료되어 자신의 정욕을 즐기기 위해 그 풍성함과 능력을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질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가지신 풍성함이 결코 세상을 사랑하여 좇아나는 정욕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이 정욕의 삶입니다.

그 정욕의 삶을 위해 주님이 가지신 풍성함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간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것을 개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것뿐이지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지나치게 개인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틀 안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조명해야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의미가 제대로 다가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으로 인해 주어진 보디발 집안의 복과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면 정욕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 안에서 생각하며 우리의 가쁨과 소망을 삼을 때 내 정욕의 삶을 위해 그저 복달라고 하는 간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기     도 

 

 

 

 

복음의 부요함을 내 정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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