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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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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5. 28. 00:00

<창세기 50:1~3> 애굽관습을 따른 야곱의 장례

 

 성경말씀 : 창세기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말씀묵상

파란만장한 생을 뒤로 하고 야곱은 평안함 가운데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은 수종 의사를 불러 장례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장례는 애굽의 장례법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야곱의 시신에 향 재료를 넣는 기간만 40일이었습니다.

향 재료를 넣는 기간을 포함하여 70일 간의 애곡 기간이 끝난 후 가나안에 있는 조상의 묘실로 떠났습니다.

또한 10절을 보면 장례행렬은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다” 고 했습니다.

이는 가나안의 장례풍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막벨라 굴에 야곱을 안치했습니다.

이는 히브리식 장례 모습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야곱의 장례를 애굽식 가나안식 히브리식 세 가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요셉이 혼합주의에 빠진 것 같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야곱의 장례식에서 세 문화를 모두 수용한 것은 그것이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애굽에 살고 있기에 그냥 애굽의 장례식으로 한 것이요 장례행렬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기에 가나안 장례로도 한 것입니다.

그 장례에 참관한 모든 사람들을 고려해서 한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기독교 문화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인 초창기에는 신자들의 장례식때 화장을 하지 아니하고 매장을 주로 했습니다.

그것은 화장은 불교식 장례법이고 매장이 기독교식 장례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한데에는 성경에 나오는 장례가 모두 매장 방식이란 것이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장례모습이 매장인 것은 성경의 배경이 된 중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장례문화가 매장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매장을 신자의 장례방식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도 없고 매장이 복음의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부활할 몸은 지금의 이 육체가 아닌 신령한 육체로 부활합니다.

매장을 하나 화장을 하나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문화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절대적인 주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

문화란 한 시대의 방식일 뿐인데 정해진 어떤 방식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지금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고 또한 그 나라를 늘 소망하며 살아가는 십자가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나라이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의 삶이라는 의식으로 세상에 빠지거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에 의해 바울을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9:18-23)


다만 바울이 이렇게 얘기한 것은 그가 복음의 능력안에서 살고 있었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방종하며 살고픈 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장례 방식으로 진행한 것도 그 화려한 장례 방식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흔들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약속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화려한 장례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사실 삶에서 복음의 본질과 문화적인 요소를 정확히 구분해 내는 것이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의  시금석은 이것입니다.

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일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소망과 열정을 가짐으로써 신자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 바울과 같이 여러모양으로 나타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     도 

기독교 문화와 복음을 혼동하지 않게 하시고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화가운데 들어가서도

힘있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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