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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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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22. 12. 7. 00:06

<창세기 25:22~26> 선택의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성경말씀 : 창세기 25:22~26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말씀묵상

 

오늘 본문의 태중에서의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의구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예정설만큼 교회사적으로 논쟁이 된  주제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정론의 쟁점이 되는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사랑이요 공평하신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정론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로보트요 꼭둑각시 같은 존재로서 모든 죄의 책임을 하나님이 떠 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짧은 지면상에 그것을 다 논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척 불공평하고 냉정한 분이란 인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정교리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드러내는 것도 없습니다.

에서를 미워했다거나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는 표현의 원문상의 정확한 뜻은 그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삶을 그대로 내 버려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택자를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신 것 뿐입니다.

예정을 이야기할 때는 원래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던 상황이란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프다’ 는 속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살아도 다른 사람이 잘 산다면 좋아해야 정상적인데 내가 잘 살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모두가 못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악해서 그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옥 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중 일부라도 구원을 받는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닙니까?

그렇게 불평하는 마음이 들때 오히려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구원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면 심판의 근거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론과 숙명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숙명론은 우리 인간을 로보트나 꼭둑각시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에는 한 인격체의 자유의지가 그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나 꼭둑각시 같이 기계적인 설정을 해 놓고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원하여 반응하게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운명론은 이미 확정된 미래의 사실을 감지하고 그것 때문에 땀 흘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예정론은 이미 약속된 미래의 사실을 바라보고 그것을 위하여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모두 말합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이것을 연결하려면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 세계입니다. 때문에 예정을 논할 때에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3차원 세계의 개념과 용어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차원 세계에 갇히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에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항상 현재요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창세전이지만 그 분에게는 현재입니다.

 

타임머신에 현대 무기들을 가득 싣고 사차원 세게를 여행하여 임진왜란때로 가서 왜군을 섬멸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그렇다면 역사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다면 역사가 뒤죽박죽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 수 많은 모순과 아이러니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시 공간의 제한을 받는 3차원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4

차원 세계에서는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역사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3차원에 존재하는 개념인 역사를 4차원에 적용하다 보니 모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한다는 발상 자체가 3차원 세계에서의 논리이고 발상입니다.

4차원 세계에는 과거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여행 자체가 3차원 세계의 개념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3차원 사고를 벗어날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현재이시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4차원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차원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3차원 세계의 개념으로 설명하다 보니 이런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를 보고 예수님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가룟유다는 불택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룟유다를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분명 유다는 불택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3차원의 논리로 설명하자니 모순이 생깁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연이어집니다.

우리는 이성과 논리로 설명을 모두 할수 없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함에 그저 머리를 숙이고 그분을 경배할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선택의 교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3차원 세계의 관념 안에서 선택의 교리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운 속성을 잘 드러내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하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논리가 교리 차원에서만 머물게 되면 끝없는 논쟁의 뜨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거기서 멈추지 말고 신앙고백의 차원에서까지 이르게 될 때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게 된 자라면 누구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불구하고 이렇게 나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선택의 교리입니다.

 

 기     도 

 

 

 

나를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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